모르는 전화번호, 망설이다 수신 버튼을 누른다. 뜻밖에 관등성명을 외치는 목소리. 처음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구? 다시 관등성명이 나온다.
나무에 물오르듯이 천천히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헤어진 뒤 잊고 살았던,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어떻게 나를 찾았는지 물었더니 신문 때문이었다고 했다. 언젠가 써 두었던 군대 이야기 몇 편, 고향 신문(열린 순창)에 실은 적이 있었다. 연재에 어울리지 않았지만 묵혀두기 아까워서 실은 작품이었다. 글에 언급되었던 이름들이 그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곧바로 신문사에 전화를 해 알아낸 번호라고 했다.
군대(軍隊)에서 만났지만 내가 겨우 한 달 선임이었음을 그의 말을 듣고 알았다. 군 의무병, 군의학교에서 내가 648기, 그가 652기. 무슨 연유로 친하게 됐는지는 까마득히 잊었다. 당시 군의학교 군기는 1기만 빨라도 하늘같은 존재였다. 통화가 되자마자 관등성명이 나온 것도 그 때의 습관 때문인 것 같았다. 그 먼 강원도 땅에 자대배치 받아 가보니 내가 행정과에 앉아있더란다. 몇 달 함께 있다 파견을 나갔다는 그의 말이 의외였다. 우리 부대로 배치되어 만났다는 것을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 생김과 이름 끝자가 호가 아닌 오라는 것까지 기억해 내는 것을 보고 그도 놀라는 눈치였다.
50년 만의 대화였다. 이젠 인연조차 지워져 가는 삶의 뒷골목에서 잊혔던 옛 기억이 떠오르다니. 묵은 필름에서 다시 내 모습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단박에 친구가 된 그는 동백꽃이 많이 피는 고을에 살고 있다. 단 한 번도 고향을 뜬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고향을 몇 번, 스치듯 지나기도 했던 나였다.
‘50년이 흘렀구나.’
만나기도 전인데 마음이 뜨거워진다. 그러나 지금 솟는 이 탄식은 무거운 것일까 가벼운 것일까, 알 수가 없다.